예전에 뉴욕에서 헤드윅 뮤지컬을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차에 올라가서 거의 극 내내 아웃사이더 랩을 방불케하는 대사를 치는 뮤지컬이었는데,
다들 박수 치고 웃을 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얼마 전 H와 퇴근하는 길에 뮤지컬 시카고 25주년 기념 내한 공연 포스터를 봤고,
최애 뮤지컬 영화가 시카고인 H와 보러 가기로 했다.
숙제가 생겼다.
공연 전에 미리 시카고 영화를 보고 가야 했다.
헤드윅 사태가 반복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이번 주에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4일에 걸쳐 기어코 영화를 다 봤다.

도착하니 사방팔방에 모니터가 있었고 자막이 나왔다.
심지어 캐릭터별로, 감정별로 제각기 다른 폰트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영화를 미리 보고 간 시간이 무의미했던 건가?
아니었다. 배우들의 표정, 손짓,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 이해를 넘어 연기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한 단계 더 나아간 경험을 했다.

그럼 헤드윅 때는 분명 영화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왜 미리 보고 가지 않았을까?
시카고가 첫 외국어 뮤지컬이었다면, 헤드윅은 박수를 치며 봤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불편함을 느끼면 반복되지 않도록 꼭 개선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꼭 불편함을 겪어야만 해결의 방법을 찾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해결이 아니라 한층 더 성장하는 방향일지도 모르는데
경험한 범주에서만 개선과 최적화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불편감과는 별개로 굳이 더 할 수 있는 것들의 우선순위를 내가 미뤄두지는 않는지,
자막이 흐르는 모니터를 보면서 마냥 즐겁게 즐길 수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