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째 쓰고 있는 노트가 있다.
‘복면사과 까르네‘, 고2때 문구광이셨던 학원 선생님의 추천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프랭클린 플래너를 쓰고 있었고,
복면사과를 처음 썼을 때 좋은 느낌은 있었는데 무엇이 엄청 좋은지는 잘 몰랐다.
근데 희한하게 자꾸 손이 갔다.
어떤 필기구든 걸리는 느낌 없이 부드럽게 써졌다.
책등(?) 부분에 튀어나오는 게 없이 180도로 완전히 펼쳐져서 두 페이지에 걸쳐 달력을 그리기 좋았고,
만년필을 좋아해서 필사를 종종 했었는데 잉크가 안 묻어나고 비침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플래너로 사용하면서 하루에 거의 10번 가까이 펼쳐도 종이가 떨어져 나오거나 틀어지는 게 없었다.
디자인도 아주 심플했는데, 아무 무늬도 없는 단색 표지다.
그래서 줄이 있는 버전은 플래너와 일기로, 줄이 없는 버전은 아이디어와 드로잉 노트로
표지에 스티커도 붙이고 그림도 그리며 내 마음대로 꾸며쓰는 재미가 있었다.
나름 문구 덕후라 이것저것 안 써본 것이 없었는데,
모든 노트가 점차 복면사과로 단일화 되어가니 어떤 브랜드인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대표님이 무려 4천개가 넘는 포스팅을 해오신 블로그가 있었다.
설립부터 지금까지 1인 기업으로 혼자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노트의 탄생 스토리부터 매달 노트 제작 과정을 담은 방대한 아카이브였다.
단순히 회사 소개를 기대하고 들어갔던 블로그였는데, 복면사과가 피땀눈물로 빚은 노트인 걸 알게 됐다.
모든 노트는 베트남 장인 할머니들께서 만드신 handmade 노트였다.
내가 노트를 쓰면서 느꼈던 튼튼함과 편안함이 그저 나의 느낌이 아니었다.
복면사과가 좋은 이유를 생각해보았는데 이런 것들이 생각이 난다.
좋은 필기감, 튼튼한 제본, 눈의 피로도가 적은 미색 종이.
노트라면 응당 갖는 특성 같아 보이지만,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노트를 찾기는 어렵다.
대표님은 좋은 종이를 찾기 위해 2년을 찾아다니셨다고 한다.
기본에 충실하다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으면 좋겠다만,
복면사과는 기본에 진심인 노트다.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경험을 위해 십 년이 넘도록 노력을 쏟았고, 그 노력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다.
또한 12년간 함께 노트를 만드신 장인 할머니들의 은퇴 기념으로
‘그녀들의 라스트 댄스‘라는 PSG 한정판 노트를 출시하기도 하셨다.
제품뿐만 아니라 제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에게도 정성을 다하시는데,
그런 마음을 가진 분이 만든 제품이 어떻게 안 멋질 수 있을까!
좋은 품질만큼 멋진 이야기를 가진 복면사과,
노트 유목민이시라면 꼭 한 번 써보시길.
(복면사과를 한 권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써본 사람은 없다고 얘기하는 블로거도 있다.)